취리히 중앙역에 도착한것은 한참 전이었다. 부스안에 글씨를 쓰면 역 천장위에 글자가 전달되서 내가 쓴 글자가 천장에 빛으로 다시 그려지는 재미있는 시설에 넋이 나가서 그 붉은색 공중전화박스 같은 중앙역 한중앙에서 이름을 쓰고, 하트를 그리고, 싸인을 하고 뭔가를 계속 새겨대면서 취리히 중앙역 천장이 내가 그린것들로 변해가는것에 어린아이처럼 한참 취해있다가 시간이 지난것을 뒤늦게 알고 중앙역을 나왔는데 역을 빠져나오자마자 신호등 앞으로 긴 트램이 두대 나란히 지나가면서 바람이 휙 몸을 향해 덮쳤는데, 취리히에서 마주한 첫 풍경이 바로 이것이었다.


10초도 지나지 않아 지워질 글자로 사랑의 서약을 하면서 역 안 천장을 바라보는것보다는 역시 취리히를 차분히 걷는편이 더 행복한데, 나는 매번 너무 많은것들에 정신을 빼앗긴다. 쇼윈도 안쪽편의 초콜렛으로 만들어진 토끼인형이라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색 모자와 정장, 구두로 풀 셋팅을 한 동화속에서나 나올법한 백발의 할머니의 패션같은.


아니, 다시 생각해봐도 눈길을 주지 않을수 없는 것들이다. 호기심 어릴 시선이 닿을곳이 많고 내가 살던곳과 다른 풍경이 끊임없이 지나가서 자꾸자꾸 여기저기 정신팔리는 도시 취리히. 그래서 나는 그곳에 도착했을때 눈이 오는지도 몰랐나보다. 그래도 봄이었는데, 돌아오고 나서 사진을 보고야 알아차렸다. '아. 역에서 나오자 마자 눈이왔었구나' 그래도 봄이었는데 내리는 눈이 신기할법도 했을텐데, 눈이 오는지도 모를만큼 여기저기 정신이 팔려있었다



스위스의 수도보다 더 많이 알려진 도시 취리히 


| 취리히 중앙역 앞


횡단보도도 짧고 몇발자국 뒤로 물러나면 바로 건물들과 가로수 나무에 부딪힌다. 길은 넓은데 건물들이 크고 웅장한 편이라 내가 원하는것만 온전히 사진에 담기 어려운것이 항상 유럽이었지 싶어진다. 앞에서 찍으면 건물을 다 담을수없고, 몇발짝 물러서면 신호등이 걸리고, 완전히 뒤로 서면 동상과 전깃줄이 엉켜있다. 개선문같은 형태를 보니 나도모르게 의미도 없이 사진에 담아보려고 꽤나 노력하고있었다.


인접국가(독일,프랑스,이탈리어)의 언어로 표기되어있는 것이 중립국임을 조금은 티내고있군 싶어진다. 세개의 언어를 쓰는 나라이기 때문에 각 언어별로 철도청을 다르게 부르고 독일어로는 SBB, 프랑스어로는 CFF, 이탈리아어로는 FFS. 




봄, 반호프스트라세 거리


| 초봄 취리히의 거리


항상 이즈음의 계절이 가장 좋았다.아파트에서 나올때도, 가로수길을 걸을때도 '아 갑자기 봄이되었다' 라고 알수있을 것 같은 시기를 나무들이 알려줄 때. 매일같이 출근하는 길이고, 매일같이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연두색으로 길이 바뀌어있을 때. 그날의 아침이 시각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계절을 느끼면서 가장 행복하다. 이렇게 내가 사랑하는 계절은 항상 안타깝게도 2일을 넘기지못하고 사라져버린다


붉은 첼로가방을 맨 남자를 보니 친구가 생각난다.꽤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전혀 친하지 않았던 친구. 집에서 나가고 난 뒤로도 친하다는 수식어는 애매했던 친구. 지금은 수식어나 명사가 필요없는 정말 설명하기 애매한 상태로 신기하게도 관계는 엄청나게 진화했고 나는 아마 저런형태의 악기나 가방을 메고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너무 당연하게 그자식을 떠올리게 될것같다.




쇼윈도의 신상품들로 가득한 오래된 도시


| 반호프스트라세 - 취리히 주요 쇼핑가


명품에 관심이없다. 구두에도. 시계에도. 가방에도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진열해놓은 공간과 로고 디자인과 컬러와 패턴에 관심이 많다. 관심이 없지만 취향이 있다는것은 자칫 위험하다. 항상 오랜기간동안 내 옆에 있는 남자를 보면서 느낀다. 관심이 없지만 취향이 있다는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한번씩 내 지난 사진들을 보면서도 놀란다. 아 위험하다 이 사진은 없애버려야겠다고


쇼핑거리로 드높은 명성을 자랑하는 곳이니 만큼 명품에 문외한인 나도 들어볼만한 큼직큼직한 명품 브랜드의 가게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있다

취리히 내 주요 쇼핑가로 세계적인 패션, 시계, 보석, 부띠크, 백화점등 고급 상점이 빼곡하게 자리잡고있지만 건물의 외관은 일정하게 구식을 유지하고 있다. 쇼윈도가 있고 조그마한 간판이 걸려있을 뿐 거리의 미관을 전혀 해치지 않는 선에서 혼자 튀어보고자 나서지 않는것이 참 마음에 든다. 건물의 반을 다 덮어버릴 만큼의 커다란 간판과 인도를 점령하고 있어야할 베너, 새로 오픈한 가게를 알리기 위해 고용한 나래이터 모델과 거리를 시끄럽게 할 대형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정신없는 음악이 없다




차없는 거리, 오직 트램


|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 사는것에 스스로 만족하는 도시


가뜩이나 차분하고 정갈한 반호프스트라세 거리 전체가 보행자 전용으로 지정있어서 인도가 넓기도 하고, 차가 없으니 거리가 한적한 느낌이기도 하다. 건물 1층은 항상 인도 갓길에 세워놓은 승용차나 스쿠터등으로 시야가 막혀있는 환경에 눈이 익숙해져있다가 차없는 거리를 보니 허전하고 낮설다. 길 한가운데 깔린 레일로 가끔 트램이 지나다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눈이 시원한 느낌이든다


이곳에 사는 시민 90%가 넘게 다들 취리히에서 사는것에 만족한다는 이 도시는 구식과 현대가 섞여있다. 낡고 오래된 장식이 어마어마한 건물안에 미니멀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평품점들이 들어서있다. 어느곳이나 가로수길은 있고, 명품점들도 상점들도 사람들은 존재한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라. 많은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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