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랄랄라라라 필리핀 배낭여행 ]

THE GIRL, COMES FROM FAIRY TALE

 

블라복비치 화가의 화실과 보라카이의 이방인

터줏대감과 이방인의 여유

 

 

 


누가 봐도 쉽고 편한 보라카이는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즈음 다녀가려고 저 멀리 미뤄둔 곳이었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곳으로  숙소를 구해보려고 예약 사이트를 뒤지고 뒤져봐도 좋은 평가가 있는 객실이 남아있을리 없었다

섬 특성 때문인지 곰팡이와 습도, 에어컨 문제의 글들이 항상 써져있었고 스테이션 2의 화이트비치 쪽 숙소는 쥐나 벌레 등의 악평으로 명성이 자자한 곳들만 남아있었다

어차피 번화가 쪽에 숙소를 내가 잡을 일은 많지도 않았지만,
이번엔 마음속 깊은 곳까지 털어버렸으면 싶을 사람과 함께 머물 숙소를 잡아야 한다.
 
해외까지 와서 이 사람 저 사람 자주 마주치고 부대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바로 바다가 보이고, 언제든 목 끝까지 차오른 비명을 토해내면서 맨발로 뛰쳐나가 머리끝까지 바닷물 속에 처박는 미친 짓을 수도 없이 할 수 있을만한 곳으로, 매일같이 나갈 때 리셉션을 지나치지 않아도 되고, 형식적인 최소한의 옷매무새 따위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될만한 곳으로 몇천 번이고 바닷물로 몸을 던져버릴 수 있을만한 곳으로,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게 어렵지 않을만한 곳으로 겨우 숙소를 골라잡았다
 
 

그녀는 조울증 환자처럼 매일매일 감정 기복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엉망진창이었다
한없이 행복하고 한없이 즐겁고 끝없이 따뜻한 미소를 품고 있다가도 순식간에 먹구름을 가득 드리우곤 했지만 바다를 향해 몸을 내던지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몇 번이고 그녀가 바다를 향해서 지칠 때까지 뛰어들기를 바랐지만, 그녀의 장점처럼 보이는 잘 참고 잘 버티고 잘 눌러놓는 성향이 모든 것들 앞에서 멈칫하게 하고 주저하게 하고 간단한 것들조차 망설이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폭발하지 못할 화산이라면, 조증인 상태인 것이 추억으로 돌아봤을 때 이롭다
 
나는 소소하게나마 머리를 묶어주고 예쁜 꽃을 꽂아주는 것으로, 시답고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낄낄거리는데 사용되고 버려지는 무용한 것 같은 것들로 즐거운 시간을 조금이나마 늘려볼 요량이었다



 
 

보라카이의 우기 동안 쉴 새 없이 내리고 휘몰아치는 바람은 내게도 동생에게도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지만 그녀는 달랐다
우기에 왔다는 것을 사전에 수차례 이야기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감정 기복은 마치 날씨 때문인 것처럼, 그치지 않는 비 때문인 것처럼 가라앉음이 심했다

어차피 날씨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삶의 기복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짧게라도 해가 뜨는 시간을 버리지 않고 즐길 수 있으면 된다.
비가 오더라도 내가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으면 된다
 
 
 

원래 많은 것들을 미리 예상해 놓는 성격이라서, 나는 혼자 있는 시간까지 계획안에 넣어두었다

나는 밤마다 두 사람을 예약한 곳으로 보내놓고 혼자 숙소에 남아서 침대에 누운 채로 빤히 그림을 쳐다보거나 가로등만 켜진 어둑한 숙소 앞을 산책하거나, 내 바로 옆방의 숙소 주인인듯한 화가 할아버지가 그리고 있는 자화상을 쭈그리고 앉아서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는 해가 떠있는 시간에는 주문받은 그림을 그리기에 여념이 없이 바빠 붓을 놓을 새가 없었고

숙소 앞이 가로등으로 드문드문 노래질 시간에는 그리다 만 자신의 자화상을 보고 턱을 괴고 앉아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느라고 양손이 가벼운 상태였다

그러다 창밖에서 자신의 자화상을 보고 있는 자신을 구경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일이 잦아졌다
 
 
 

보라카이에 머물면서 드나드는 여러 공간에서, 나는 종종에서 점점, 그의 그림을 발견했다
어딘지 모르게 반가운 마음과, 그의 자화상과, 주문받아 그리고 있지만 미완성인 일러스트가 놓여있는 이젤을 떠올리면서 어느 곳에서 있건 내가 그의 옆방에 머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팔리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원치 않더라도, 생업을 이어갈 수 있는 주문을 받는 것 또한 훌륭한 일이다
그리고 바쁘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지
 
먹구름 낀 그녀와 한 공간 안에서 시간을 죽이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배낭여행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면서 아무 걱정 없이 깔깔거리는 어린 여자애들 같은 짓을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버거웠을 수도 있겠다

내게 멋진 시간이 그녀에게는 버거울 수도 있다
 
 
 

미친 듯이 퍼붓는 비를 뚫고 숙소로 빠르게 걸어들어오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나는 시간 내에 이곳을 마음에 다 담고 떠나야 하는 이방인이고, 어느 곳에나 걸려있는 이 그림들은 보라카이의 주인이었다

다시 혼자 남는 시간이 되면 가장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아무도 돌보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기분으로 팔을 괴고 누워서 보라카이의 주인을 바라본다

더 이상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될 때 즈음,

눈인사만 주고받는 옆방의 할아버지에게 그림을 의뢰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언제부터 내가 좋아했던 일이 가장 버거운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 내가 잘했던 일이 가장 자신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 원했던 일은 왜 변하지 않고 계속 원치 않게 되는 순간이 오지 않는 것일까 뒹굴뒹굴거린다
 
 
 

언제나 모진 말만 듣고 눈칫밥을 먹다 결국 다른 곳으로 보내져버린 미미는 잘 있을까.
미움받지 않기 위한 몸부림만 가득했던 작은 체온을 매일 마주했던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내가 가던 길을 놔두고 자꾸만 샛길로 새서 기웃거렸던 시간들은 대체로 내가 내 삶의 주인이면서도 관전자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인가, 천연덕스럽게 호기를 부린 여유치고는 뒷맛이 쓰다

 

 

 

 


내 인생길에 잠깐 나와서 걷는 산책이,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라서 그러려니.
그리고 모두가 각박하고 쫓기기 때문에 그러려니.
비와 밤 사이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간에서, 나와 함께 이곳에 방문한 이들이 사라진 시간에.
타인에게 호기롭게 친절하고 상냥했던 마음은 혼자가 된 시간에는 의미가 없어진다
 
 


 

비 오는 밤, 숙소에서 불과 2~30걸음이면 도착하는 작은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할아버지를 다시 발견하고 다시 손을 흔들면서 웃음으로 인사했다.

언제나 동행인이 좋아할 만한 여행을 만들어서 그 사람이 더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가 내가 행복한 시간인 것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까. 타인의 행복으로 내 행복을 채우려고 하다 보니, 타인이 내려앉을 때마다 내가 조금 더 분발하고 노력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 정도만큼 내가 즐겁지 않은 것을 보니 자기 객관화가 덜 된 것 같다

더없이 좋은 곳에서, 더없이 좋은 이웃과, 더없이 훌륭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그렇게 어려운 방법으로 행복을 찾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에게서 찰나에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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