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과 함께하는 여행

움직임과 정지가 공존하는 공간

랄랄라라라 2024. 11. 25. 09:24

[ 랄랄라라라 필리핀 배낭여행 ]

THE GIRL, COMES FROM FAIRY TALE

 

 

움직임과 정지가 공존하는 공간

어느 곳에 나는 멈춰 서는가  
 

 
 

양파를 심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애먹는다는 아버지의 전화를 오늘도 한 귀로 흘려듣는다

생업으로 하시는 것도 아닌데, 양파 그까짓 거 안 심고 사 먹으면 되지 뭐 하러 수고스럽게 고생해 가면서 일을 만든단 말인가

이 정도면 사서 고생이고 스트레스를 일부러 만들어서 하루하루를 사는 것 같다고 까지 잠깐 생각했다

 

하루종일 회사에서 부대끼다가 녹초가 된 나에게 아버지의 고민은 와닿지가 않는다

 

몇 년 뒤에 내가 후회하고 속상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 순간 마음을 열고 진심 어린 소통을 해야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하더라도 아버지의 고민들은 생업을 위한 것도 아니고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니 자꾸만 내 우선순위에서도 내 마음속에서도 멀어지고 자연스레 흘려듣는다

 

 

'아주 심기'라는 말을 읽었던 적이 있다

[가을에 씨를 뿌려둔 양파가 싹이 날 때까지 키우다가 거름을 가득 준 밭에 완전히 옮겨심기]

 

이제는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그 땅에 뿌리내린 채로 키운다는 단어였나

 

한번 뿌리내린 곳에 아주심기를 하고 나면 한겨울의 추위에도 죽지 않고 혹독한 날씨를 견뎌내면서 살아난다

그리고 아버지는 마트에서 파는 양파들보다 몇 배는 달다고 내겐 시답잖은 자랑을 하시면서 양파를 좀 보내겠다고 유세를 떠실 것이다

 

 

 

 

아버지의 인생은 단 한 번도 아주심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한 곳에 뿌리내리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지만 계속 실패했으니 원시 수렵인으로서의 문명인이 아닌 이상 삶이 얼마나 고될 것인가

 

부모가 뿌리내리지 못할 동안 성인이 되지 못한 나는 같이 선사시대의 인류처럼 정처 없이 강제로 떠돌아야 했으니 안정되지 못한 환경에서 오는 분노와 두려움이 가끔은 모두 내 아버지 탓인 것처럼 그가 미웠다

 

내가 뿌리내리려면 내게 먼저 '고향' 비슷한 형태의 마음과 머리가 동시에 수긍할만한 조건의 영역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마땅치도 않은 일이었고 당신의 노력이 뒷받침 돼야만 가능했다

 

 

 

 

그가 노년에 들어서고 드디어 처음으로 초라한 시골집 하나를 샀을 때, 나는 정말 온 세상을 다 가진 마음이 돼서 기뻐했다

 

내게도 이제 고향이 생긴 것인가

 

이미 성인이 된 지 20년이 지나버렸지만 나는 이곳에 마음의 뿌리를 내리고 추억을 쌓아가면서 언제든 힘든 일이 생기거나 세상의 절벽 끝으로 내몰릴 때엔 내게도 돌아올 곳이 생겼나 보다 싶었다

 

안타깝게도 그곳은 내게 '친정집'이나 '고향'같은 곳이 되어주지 못하고 매년 갖가지 문제로 수리비를 지출하게 하는 애물단지이자 아버지의 창고로 변해서 내 몸하나 누일 곳이 없는 짐이 되어버렸다

 

 

 

 

그곳을 갈 일이 생길 때마다 씁쓸하고 은근히 치밀어 오르는 화를 꼭꼭 눌러가면서 스스로 알게 된다

옮겨 다니면서 뿌리를 내린 적 없는 식물이 포기 나누기를 하고, 굵은 뿌리를 덜어내서 다른 흙에 옮겨 심는다고 해서 

다른 모든 식물의 아주심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뿌리이자 한 몸이었던 당신이 자리 잡기 전까지 나는 끝없이 안타까워해야 하며

별도로 내가 아주심기를 하기 위해 가야 할 길이 너무 버겁다는 것을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려던 나는, 예상치 못했던 영구차를 마주하고 멈칫해서 옆길로 빠져나왔다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는 공원의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대비되는 두 소년과 마주치면서

그 화창하고 행복한 소리들 사이의 소리 없는 두 아이의 마음속 기도가 이뤄지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보다 자주 마지막을 떠올리고 준비하는 나를 바라보면서 잠시 흐트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