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부터 그를 혐오했을까
[ 랄랄라라라 필리핀 배낭여행 ]
THE GIRL, COMES FROM FAIRY TALE
나는 언제부터 그를 혐오했을까
밖을 향한 예의, 안을 향한 혐오
대체로 평판이 좋고, 인간관계에서 힘듦을 느끼지 않은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단 하나, 내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가족이 어려운것은 거리 두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성인이 되고 주체적인 판단이 가능해질 무렵부터 부모에 대한 판단과 비교도 가능해진다
끊임없이 배워온 옳고 그름 앞에서 맹목적으로 답이었던 그의 궤변이나 힘의 복종도 불가능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서로를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가 보호자가 필요해지기 시작하고, 많은 생활에 제약이 따르기 시작하면서 수시로 내 고요한 삶에 파장이 번지기 시작한다
남들 앞에서 세상 젊잖고 옳은 길만 추구하신다고 체면과 곧은 성정 빼면 시체일 것 같던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서 참을성 없고 무뢰한 소인배로
하루에 수도 없이 보여주지 말아야 할 어린 아이만도 못한 얼굴을 보였다
이미 여러 차례 그의 본성을 알고 있는 나와 동생이
그에게 바라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실망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사실, 그를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그와 나를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는 참담함에서 올라오는 괴로움일까
그는 약자로서 배려받는 모든 순간의 특권에 잠시 흡족해하다가도
참을성 없는 이기심이 상대의 배려마저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기를 반복했다
그의 날카롭고 못된, 가시 돋쳐 있는 모든 화를 내가 다 막아서서
그 무례함이 상대에게 닿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나마저 언성을 높이면 잠깐이나마 미래의 나와 동생에게 괜찮았을 뻔했던 작은 기억마저 산산조각 내버릴까 봐
묵묵히 듣고 그와 마주치던 시선을 돌려내면서 마음에 박힌 가시를 하나씩 만지작거린다
언제나 새로운 사람에게 가장 좋은 사람이 돼서 가장 훌륭한 에티튜드를 보이는 그를 몇 발자국 떨어져서 동생이 보고 있다
조금 전까지 온갖 종류의 신경질을 부리던 사람이, 점잖고 세련된 노년의 신사의 표정으로 영원히 다시 마주칠 일 없을 이와 정중하고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잠깐 만나고 헤어지는 2분도 되지 않는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으로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은 예의 있는 관계를 맺고, 당신의 끔찍할지도 모를 마지막까지를 감당해야 할 자식들에게는 가식일지언정 30초의 예의도 참을 수 없는 것일까
자신을 위해 애쓰는 주변인에게 감사보다 언짢은 마음과 노여움만을 하루종일 내비치는 이의 옆에
모두가 다 떠나고 나와 동생만이 남았다
나는 그에게 오늘도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면서 배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나 혼자 가리고 나만 보기 위해 노력한다
내 노력이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일까
그에게서 거두지 못하는 내 연민과 정이 한심하고 아프지만, 그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한 것이라고 자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