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난 뒤의 라스페아 역은 어둡다. 기차 안에서야 운치있게 비오는것을 마냥 바라보면서 차분한 시간을 보냈지만 막상 역앞에 도착해서 내리고 나니 쌀쌀한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으슬으슬 한 추위에 어깨를 움추린채 팔짱을 껸 상태로 역 안쪽에 머무르다가 눅눅한것같은 상황이 싫어져 역 앞에 나왔다


친퀘테레로 이동하기 위한 간이역정도로 나는 이곳에서 어떤 계획도 없다. 숙박도 산책도 관광도 심지어 식사조차 계산에 넣지 않은곳이다

계획에 없던곳은 마음먹기 전까지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고 머릿속에 남을만한 커다란 망막의 맺힘정도의 멋진 풍경이나 개성넘치는 무언가가 여행객을 사로잡지 않는다면 다른사람들에게 라스페치아가 아름다운 휴양지이건, 상업 교통의 중심지이건 역사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발전하고 이곳에서 석탄이 나오고 석유가 나오고 천연가스가 나온다고 해도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치는 곳일 뿐인다


내가 라스페치아에 도착하고나서 관심이 있는것은 피렌체-라스페치아 기차노선 시간과 피사를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정도, 그리고 친퀘테레로 가는 열차가 언제쯤 오느냐는 것이다. 역 밖으로 나갈일이 없으니 이곳이 지도에서 어디쯤이고 제노바 남동쪽의 스페치아만 끝부분에 위치하고 리비에라 동쪽끝에 있다는것같은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역 앞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역앞으로 나오자, 추위와 귀차니즘을 뚫고 뭔가 조금더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할수밖에 없는 자극적인 일이 생겼다


사실 공항이나 역에서 환승을 위해 기다릴때는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돌지 않고서야 혹시나 비행기나 기차를 놓칠까 싶어지니 가만히 앉아있는게 되는데 라스페치아역에서 친퀘테레를 향해 환승을 하기까지 시간이 좀 남기도하고 계속 추위에 바들거리면서 서있자니 움직이는 편이 낫겠다 싶어 역 앞으로 나오게 된것이 이곳 거리를 조금이나마 걸을수 밖에 없게 만들, 확인하기 전까지 뭔가 궁금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멀리 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시 잘 돌아올 수 있도록 역 앞 풍경과 위치를 눈에 다시한번 잘 담아놓고 그래도 불안해서 다시한번 풍경을 눈에 새겨두고 걷기 시작한다






라스페치아 역 앞 정적인 디자인의 인간피라미드 조형물


비온 뒤엔 나뭇잎 위에 쌓여있던 뿌연 먼지들이 다 씻겨나가서 항상 초록이 더 진해보이는데, 비온뒤 뚜렷한 초록색의 산보다는 희미하고 멀리있는것같은 먼지낀 산이 더 마음에 들고 언제 한방울 떨어져버릴 지 모르는진해져버린 초록 나무보다는 먼지조금 쌓인 연두빛 나무가 더 내 취향스럽다 


역앞에 나오자마자 붉은 스턴트치어리딩 조형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인간피라미드는 라스페치아와 무슨 연관을 가지고 있는 걸까. 오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라면 현대식 조형물 스타일을 반영하지 않고 조각 석상이나 동상형태를 취했으리라 싶지만 그냥 소소한 장식적인 조형물이구나 하기에는 사이즈가 꽤 큰편이라 아무런 의미없이 세워놓은것은 아닐것 같아 자연스럽게 눈이 간다





눈에띄는 오렌지색 버스, 오렌지색 건물, 오렌지색 횡단보도


이 텅빈 버스를 타면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여행을 떠나기 전 '여기여기는 꼭 가야지'로 시작해서 살짝살짝 계획을 세우다가 여행출발 전쯤이 되면 항상 제 스프링노트는 글자가 빼곡한 스케줄 노트가 되어있다. '마음은 항상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떠나버리겠다!' 라면서 비행기표를 끊지만 표를 끊고 난 뒤 바로 떠나지 않거나 떠나기 전까지 세달 네달 꽤 많은 시간이 내게 주어져버리면 D-DAY까지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너무 버거워서 나도모르게 하나씩 하고싶은 일정을 넣기 시작하고 그러다 보면 글자가 어느정도 빼곡해지는 노트로 변해서, 내가 여행을 하러 가는것인가 이 계획을 실행하러 가는것인가 할때가 더러 있다


다음 기차와 목적지가 없었더라면 덥썩 이 버스를 탑승하지 않았을까


다음번 라스페치아에 왔을때 이 버스에 올라타면, 그것은 계획한 일이 되어버리니까 언젠가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로 캐리어도 없이 노트에 글자한자 적지않고 정말 여행자 답게 떠나볼 날이 오면 그땐, 눈앞에 마주치는 버스를 무작정 올라탈 수도 있겠다






| 오렌지색 횡단보도와 오렌지색 건물과 오렌지색 버스와 오렌지색 주택들


역앞으로 나오자 마자 궁금하고, 뭔지 확인하고 싶은 일의 발생 시작점은 내 콧구멍이었다. 어디선가 계속 시원하고 달콤항 향기가 희미하게 나는게 신경쓰였는데 향수가 아닌게 확실했다


어려서부터 비염이 있어서 냄새를 잘 맡지 못하는데 이런 하찮은 콧구멍을 뚫고 들어온 향기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움직이지 않을수가 없었다.

역에 도착하고 정문으로 나오자 마자 이렇게 좋은 냄새릉 풍기는 길이라니 호기심이 가득 생겨서 근원지를 당장이라도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사소한곳에 잘 꽂히는 나는 이곳이 왜이렇게 오렌지색으로 범벅이 되어있나, 디자인하기에 편한색은 아닌데 생각하면서 무턱대고 내리막길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 언덕아래 라스페치아 거리


비맞은 아스팔트는 더 짙은 어두운색으로 변해있고 어지럽게 걸린 전깃줄이 건물들의 높이보다 낮아서 전체적으로 도시가 거미줄에 걸린것같은 느낌이다. 거기다 라스페치아 지형이 꽤 높은편일까? 하늘을 덮은 구름과 땅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운듯한 느낌이 든다.


평범한듯 평범하지 않아 보이는 그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서서히 감이 오기 시작한다. 오르막 길 윗쪽에는 없던것들이 아랫쪽 도로변에 있었다





라스페치아 거리의 가로수 오렌지나무


| 가로수에서 떨어져서 보도블럭위에 뒹굴고 있는 하찮은 오렌지


양옆 가지런히 도로를 따라 심어놓은 오렌지나무가 모여서 아주 시원하고 달달한 기분좋은 향으로 역 앞까지 가득 덮고있었다. 조그마한 시장과 해변이 있는 도시 정도로만 알고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기분 좋은 향기에 이곳이 좋아지고 있다. 비맞은 덕분에 향이 더 진해진건지, 아니면 평소보다 비에 씻겨내려가서 향이 더 옅어졌는지 알수는 없지만 시원하고 달달한 향수보다 좋은 향기가 가득 덮고있는 거리라니. 평소에 내가 알고있던 오렌지 향과 당연히 같은것이었는데 코에 동그란 형태를 대고 직접 맡는것이 아니라고 상상조차 하지못했다




| 역시 사람 손닿지 않는 높이의 것이 가장 탐난다


가까이가서 오렌지향 맡아볼까 싶었는데, 사람키가 닿을만한 높이에는 하나도 없다. 

"여행중에 잠깐 환승하려고 역에 내렸는데, 너무 좋은 향이 나서 알고보니 가로수가 오렌지 나무였어. 그곳은 오렌지향이 온 길을 덮고있어서 얼마 머무르지도 않았는데 기분이 너무 좋아지는 곳이였어"





오렌지색 거리 라스페치아


| 나오자마자 보였을 파스텔컬러의 주택들이 이제서야 눈에 보인다


오렌지나무 가득한 가로수 덕분에 달콤하고 시원한 향기 가득한 라스페치아 거리, 간이역정도로 지나칠뻔했던 이곳이 향기 하나로 달라보인다.

한가지 색이 조금 더 눈에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역에 내릴때의 우중충하고 추위에 덜덜 떨면서 편안하지 못했던 상황들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직 이곳을 찾는다는 사람들처럼 휴양지로서의 역할은 모르겠지만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곳이다

 

다음번에 방문하게 된다면 좀더 오래 머무르면서 이곳저곳을 걷고싶어졌다. 노트에 또 머무르면서 하고싶은, 원하는 것들을 한가득 쓰고있을것 같아서 아무래도 계획없이 방문하는것은 힘들것 같지만 아름다운 휴양지로서 그땐 한산하고 행복한것을 다시찾는 마음으로 휴양을 위해 방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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