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위스여행 ]

THE GIRL, COMES FROM FAIRY TALE



기차창밖으로 사라지는 눈덮인 세상

지나치는 풍경과 마주하는 사람의 마음은 매시각 변화한다



하얀 안개처럼 기체를 뿜어내는 드라이아이스 아래로 소매를 걷어 올린 맨팔에 쭈뼛 털이 솟아오른 것 같은 브리엔츠의 풍경은 한참을 달려도 지속되었다. 체온이 떨어질것 같은 추위가 느껴지는 풍경을 어려서부터 소름끼치도록 싫어했는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차갑고 냉정한 풍경은 또 다른 마음으로 다가왔다


후후 불어도 털어질 것 같지않은 단단해보이는 설산들을 얼음송곳으로 톡톡 쳐서 떼낸 다음 술잔에 넣고 도수높은 양주를 부어마시면 차가운 속이 조금 미지근해질까. 바람이 차가워져도 상관없고 체온이 떨어져도 버틴다지만 마음이 굳는일은 항상 경계해야하는데 살다보면 수시로 내마음은 차갑게 얼어버린다


미세한 풍경의 변화에도 감성적으로 예민한 내가 오늘같은 차갑고 서늘한 색채가 계속되는 일상에서 꾸준히 버텨야야 한다면 말수가 더 적어지고 타인에게 조금 더 냉소적인 태도로 변할것같다. 하데스와 원치않는 결혼생활을 유지해야했던 페르세포네의 끔찍한 삶도 서럽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습하고 어두운 칙칙한 환경에서 일년의 3/4를 강제로 보내야하는 여자의 성격의 변화를 누가 탓할수 있을까. 따뜻한 안에있지만 얼어붙을것같은 차가운 풍경을 몇시간째 계속 마주하고있으니 계속 체온이 낮아지는것을 느꼈다

 



산에서 흘러나온 눈과 함께 물이 녹아든 호수


여행하면서 장시간 다른곳으로 이동하는 일은 매번 새로운 관문이 되고, 오히려 도착하기 전보다 더 훌륭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앉아있다가 뻐근해지는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가볍게 스트레칭 하면서도 지루하고 버거운 시간을 버틸수 있는것은 호젓하리만치 창백하고 아름다운 풍경때문이었다


여행하기전부터 온갖 괴로운 마음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얼마 되지도 않는 손에 쥔 것들을 놓쳐버리게 될까봐, 어렵게 이루어놓은 내 자리를 잃게될까봐 혹독하게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매번 마음을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하루하루가 내게 전투력을 요구했고 스스로 쌓아올린것을 무너트리지않기위해 이를 악물곤 했었다. 지금 앉아있는 가시방석이 뒤돌아보고나면 꽃방석이라는 말을 기억하면서 가시방석에서 피를 흘리면서 싸우다가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가고있었다




스위스 설산의 눈먼지


바람에 쌓여있던 눈가루가 일어나 모래먼지처럼 휘날릴때마다 재난영화를 감상하는것 같아 기뻤다. 마음속 분노가 가득했던 나는 저 눈바람이 고스란히 내 분노를 일으켰던 곳으로 가서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밀어버렸으면 하는 과격한 마음을 가지고 한참을 바라보고있었다


나 역시 다른기회를 져버리는 댓가로 기회비용성의 급여를 받는 사람이라는것을 잊어버리고 나와 회사를 동일시하면서 열정을 다하면서도 어느한순간 기여했던 내 노력과 믿음이 한순간 회오리가 되서 아픔으로 몰아치고있었다




스위스 기차 간이역의 눈덮인 풍경


눈내린 기차밖의 브리엔츠풍경을 그대로 세워보지못하고 한참을 달리다 간간이 서는 간이역에 잠시 멈춰서 숨을 돌릴때마다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밖으로 뛰쳐나가고싶다. 유리창 너머로 내 뺨 뒤로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풍경을 모두 다 기억할수가없었다


정말 온 힘을 다해서 손안의 것을 놓치지 않기위해 주먹을 쥐고있던 나를 가르치듯, 기차 창밖 풍경은 정말 빠르게 지나가버리고, 내게 남은 그림은 뭐가 있는지 스스로도 알수가 없었다. 흘러가는것을 담아보려고 버둥거리는것은 스스로를 힘들게 할 뿐 그저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달하면 그것으로 되는건데, 놓치는것들이 많을때마다 내 마음은 아쉬움으로 가득했고, 잠시 숨돌릴 틈이 생기고 간이역에 기차가 멈출때마다 나는 정말이지 멈춰서고 싶었다


내가 쥔것의 무게를 유지하면서 달릴수는 없었던걸까. 아니 쉬고싶은걸까, 자리는 사람에게 거저 주어지는것이 아니라지만 자리에 집착하고 쥔것만을 생각하고있다가는 내 목적지를 쉽사리 잊어버린다. 자꾸 간이역이 눈에 밟히고 멈춰쉬고싶어질 뿐




눈으로 덮인 조용한 세상 스위스


시간이 조금 더 흐른뒤의 나는 전보다 열정이 사라지고, 욕심을 부려봐야 부질없다는것을 알게되었다. 거칠고 괴로웠던 마음도 잔잔해지고, 전에는 가져본적 없던 고요함을 알게되었다. 남들보다 조금 빨리 찾아온 은퇴와 노년같은 심정이라고 하면 나 스스로는 만족하겠지만, 또 살다보면 내가 얼마나 부질없는것에 마음아파했는지 다시 배우게될까 싶어 사실 두렵기도 하다


일희일비하던 마음속 어린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것같지만, 그래도 소소한 행복에서 가끔 본연의 내모습을 스스로 발견할때 조금은 내게 칭찬해준다. 아직 완전히 죽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누구에게나 삶은 버겁고, 힘든 여정이 될것이다. 그러니까 나만 서러워하고 억울해 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럽게 흰머리가 나고 주름이 생기는것과 세월의 흔적을 얻게되는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겠지만, 다만 내가 감당해내지 못하고 삶에 찌든 얼굴을 가지게 될까봐, 그게 두려워진다. 




수묵화의 얼굴을 하고있는 설산


성취감 뒤의 오랫동안 그 자리를 유지하는것은 어쩌면 아이러니한게 아니였을까. 내가 뽑았던 사람이 매일매일 힘들다, 버겁다 버티고있다라는 말을 할때마다 [버틴다는 말을 입밖으로 내뱉는 순간부터 너는 정말 버티지 않아도 되는 상황까지 스스로 버티게 될거야]라고 말하면서 그저 좋은쪽으로 긍정적인 생각만으로 유지하려고했던 나 역시도 사실은 현실이 싫어서 좋은것만 보려고 회피했을지도 모르겠다


스위스에서 수묵화같은 얼굴을 하고있는 설산을 보면서, 나는 생각보다 많은것을 눈바람에 털어냈는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발랄하고 행복한 이야기들을 손에 쥐고 오던데 지금의 나는 무게를 조금이나 덜어내는것만으로도 감정적으로 감사하고 스스로 위안이 되었다




눈꽃핀 나무와 중간중간 얼어붙은 호수


내인생 다음번 목표를 잡기전, 내 인생에 공백이 생기는게 두렵고 무서웠다. 뭐라도 하고있어야할것같고, 자격증이라도 취득해야할것같고, 남들에게 뒤지지않는 경쟁력있는 기술이라도 배워가면서 공백이 생기기도 전부터 처음부터 그 틈을 메워버리려고 준비하고있었다


하지만 나는 뭘 하고싶은지 스스로 알수가 없어서, 아니 잘하고 인정받던 내가 하고싶던 일들이 이젠 의미조차 없어져버려서, 아주 긴 여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닌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내가 도데체 왜 유럽한가운데 서있는지, 이 긴 시간을 기차를 타고 이동하고있는지, 정작 보고싶은게 단 하나라도 있었는지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는 아직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않았다. 보기좋고 그럴싸한 거짓말과 궤변만 늘어놓고있을까


남들이 다 가는 호기심어린 관광지도 내게는 번거로운 일정일 뿐이다. 그냥 발길 닿는대로 적당히 산책하듯 걷다가 눈길을 끄는곳에서 조금더 머물면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스스로 진정이 되겠지. 다음 목표를 찾기전까지 덜어내지지 못한 상념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곳에서 이동하기 급급한채 또다른 세상에 덩그러니 놓여져서 새로운 걱정거리들을 안고 우선 하루 무사히 도착하고 보자, 우선 하루 무사히 지내고 보자고 생각했던 스위스의 여정은 생각보다 훌륭해지고있었다






마음한켠에서 올라오는 불안감. 정말 뒤돌아봤을때 그 가시방석이 꽃방석이었으면 어쩌지. 내가 더좋은 꽃방석을 찾을수 있을까. 아니, 더 좋지않더라도 근접한 방석이라도 갖을수 있을까.


그 아름다운 브리엔츠 호수와 기스바흐 폭포를 지나 건방지게 신이라도 된것처럼 눈덮인 마을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호사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혼자 분주한 마음을 가지고 시간을 겨우겨우 넘겨가고있던 나는, 버텨보려고 버둥거리고, 지켜보려고 안간힘쓰던 나에서 벗어난것이, 그래도 내 결정으로 내 생각으로 결론을 내는 인생의 과정을 걷고있어서 조금이나마 다행스럽다는 마음과 함께 시간과 풍경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20151201 / 이 포스팅은 포털사이트 다음 스페셜에 소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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