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랄랄라라라 필리핀 배낭여행 ]

THE GIRL, COMES FROM FAIRY TALE

 

칸나 숲의 작은 집

내 취향이 확고하게 선명할 때 
 

 

 

 

항구에서 빠져나와 한참을 달렸다

도로는 순식간에 1차선으로 바뀌더니 그조차 오래가지 못하고 조그마한 샛길로 빠져들어 무성하게 자란 나뭇잎과 가지들이 차 앞, 옆 유리를 마구 후려쳤다

 

너무 외진곳으로 빠질 때쯤이면 불안한 마음이 슬그머니 올라와야 되는데, 그러기엔 황토색 진흙과 물웅덩이 사이에 돌자갈이 가득한 높낮이가 엉망진창인 비포장도로가 아니었다

차길이 좁고 협소해서 차한대만 겨우 지나다닐 정도라서 반대쪽에서 차가 한대 오면 분명 마주 보게 될 상황이었을 만큼 교통량이나 인구밀도가 낮은 곳에 해당하겠지만 매끄럽고 하얗게 잘 포장된 도로인것을 보면 그래도 완전 외곽은 아닌 셈이었다

 

다만 차옆에 긁혀서 부러지고 휘어지는 잎과 나뭇가지들은, 이곳이 차로 자주 들락거리는 곳은 아닌가 보다 하는 추측만 더해주었고, 마침내 도착했을 때는 어떤 건물의 형체도 보이지 않는 대나무와 각종 초록색 식물들 앞에 덩그러니 작은 대문만 있는 곳에 내려졌다 

 

 

 

 

 

 

 

사실, 이런 형태일것이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구글 로드뷰를 통해 길이얼마나 좁은 지도 확인했고, 숙소의 입구를 인터넷에서 미리 확인해 볼 수 없어서 몇 번이고 가상으로 왔다 갔다 해봤던 길이었기 때문에 노파심 같은 것은 없었다

 

대문을 열고 좁은 돌과 이끼 사이의 바위계단을 올라 숙소를 안내받을때까지, 사람보다 높게 자란 칸나가 이 건물들을 온전히 덮고 있었다. 중간중간 보이는 노란색 난초와 칸나꽃이 완전히 초록색 속에 파묻히지 않도록 도와주었을 뿐 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도 전체적인 호텔맵(?)을 한눈에 파악하기 불가능할 만큼 칸나의 키가 컸다

 

 

 

 

 

 

 

모든 건물을 다 가릴만큼 높은 칸나들을 수없이 지나치고 작은 돌계단을 꽤나 밟고 올라와서 겨우 숙소 문을 열었다

내 선호도가 고스란히 반영된 곳에 도착하니 마음이 편했다. 아무도 없고 번화하지 않은 구석에 관광객도 전무하고 이곳에 사는 현지인도 하루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할 것 같은 조용한 곳에 드디어 짐을 풀었다

 

빌라 한채만 운영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우리 말고 다른 투숙객은 없었다

벌거벗고 돌아다닌다고 해도 빼곡하게 높은 칸나숲에 가려져 인간같은것은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여행 내내 막내노릇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노력하던 기특한 강아지도 이곳에 도착하고 난 뒤로는 더 이상 혼자 고민하거나 미리 준비할 것들이 사라져서 다시 살이 차오른 것처럼 보였다

 

 

 

 

 

 

 

 

어젯밤에 주문한 룸서비스의 딱딱한 냉동피자와 먹지 못할 정도의 파스타를 고대로 돌려보내고, 이미 결제가 완료된 조식도 포기하고 이동한만큼 허기가 심했는데 도착하자마자 뜨끈한 오믈렛을 먹고 이제 배도 채웠다

 

나쁘지 않다, 내가 생각했던 정도였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배를 채우고 나니 다 기대 이상이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리셉션은 따로 없고 칸나 숲 꼭대기에 위치한 조그마한 식당에서 두 명의 인원이 상주하는 것 같다

우리가 식사할 때 외에는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체크인, 체크아웃 시간도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서 하면 되고 처음 도착해서 먹은 식사도 무료에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케이크를 중간에 서비스로 받거나 계속 따듯한 우유를 받는 등의 소소한 정도 느꼈다

 

이곳에 머물면서 컨트리사이드를 도보로 돌아다니다가 이곳 직원을 길에서 만나게 되면 마치 아는 마을 주민을 만난 것처럼 스몰톡을 하다가 같이 차를 얻어 타고 돌아오곤 했다

 

 

 

 

 

 

 

우리를 지겹게 따라다니던 비도, 이곳에 도착하고 첫 끼니를 해결한 이후로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경보 때문에 바다에 들어가 보지도 못해 배낭 안에 얌전히 개져있던 여러 벌의 수영복을 이곳에 도착해서야 수도 없이 갈아입었고 원 없이 물 위에 떠있다가 지겨울만하면 꼭대기로 올라와 따듯한 차를 마시면서 망원경을 이리저리 바라보면서 목적지를 정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이곳에 나와있는 망원경은 별을 관찰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칸나숲에 사는 원숭이가 가끔 바깥세상을 슬쩍슬쩍 훔쳐볼 정도는 되는 꽤 만족스러운 물건이었다

 

 

 

 

 

 

 

 

하루종일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강아지는 이곳에 도착하고 해달이 되었다

 

물 위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채로 떠있는 해달 한 마리는 주로 수영장 물가에 서식했는데 태어나서 배워보지도 못한 수영실력으로도 천연덕스럽게 온 수영장의 물을 다 빼버릴 것처럼 물속을 쏘다니고 첨벙거리고 하하 웃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에서 기어 나와 햇빛을 직통으로 바라보고 누워서 몸의 체온을 올리곤 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같이 놀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많은 해달이 사람을 꼬셔서 자꾸 물속 깊이 데려가려고 했기 때문에 나는 해달과 거리를 상당히 둔 채로 맞은편의 라탄침대에 담요를 덮고 누워서 해달을 구경하는데 주로 내 모든 시간을 다 사용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기 시작했다

사소하게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사라지고 뭔가를 해야 하거나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고 안겨주고 싶고 느끼게 해주고 싶은 압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많은 만족감을 얻었다

 

 

언제나 살랑살랑 흔들리는 이곳의 모든 것들은 대체로 소소하고 따듯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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